'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라는 대주제 아래 개막한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인류의 이주와 소외, 그리고 경계를 허무는 예술적 실천을 조명했다. 그러나 매회 반복되는 이 '미술계의 올림픽'에서 모든 국가관이 찬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이엔드 매거진 Sightsynch는 이번 비엔날레에서 유독 비평적 혹평을 면치 못한 공간들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히 예술적 취향의 문제를 넘어, 19세기적 유산인 '국가관' 시스템이 현대 미술의 탈경계적 가치를 담아내기에 얼마나 비좁은 그릇인지를 증명하는 시각적 지표이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언급되는 실패의 사례는 이집트관이다. 와엘 쇼키(Wael Shawky)의 <Drama 1882>는 19세기 영국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우라비 혁명을 오페라 형식의 영상물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방대한 역사적 사료와 고도로 연출된 미장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서사의 무게가 아닌 **'설명조의 지루함'**이었다. Sightsynch는 이를 '시각적 과잉이 불러온 공감의 단절'로 해석한다. 예술이 역사적 사실의 재현에만 매몰될 때, 공간은 관객의 사유를 자극하는 대신 일방적인 교육의 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페인관의 산드라 가마라 헤시키(Sandra Gamarra Heshiki)가 선보인 <Pinacoteca de Migrante(이주민의 회화관)> 역시 비평가들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식민지주의와 약탈의 역사를 비판하기 위해 미술관의 형식을 빌려온 시도는 유의미했으나, 그 표현 방식이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교과서적이었다는 평가다.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박물관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려 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권위주의적 질서 안에 갇혀버린 형국'**이다. Sightsynch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동시대 미술이 지향해야 할 '열린 해석'을 차단하고 관객을 정답이 정해진 담론 속으로 밀어 넣는 우를 범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관의 사례는 예술과 정치의 긴장 관계가 공간을 어떻게 '무효화' 시키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시다. 아티스트 루스 파티르(Ruth Patir)와 큐레이터들이 가자 지구의 휴전과 인질 석방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전시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하며, 파빌리온은 굳게 닫힌 문 뒤로 침묵을 선택했다. 이는 '가장 강력한 저항'이라는 평가와 '예술적 직무 유기'라는 혹평 사이에서 표류한다. Sightsynch는 이 닫힌 문 자체를 하나의 설치 미술로 규정하면서도,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파빌리온이 국가의 정치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공간적 공백으로 남았을 때 발생하는 허무주의에 주목한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노출된 '실패한' 기획들의 공통점은 주제를 시각적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맥락의 경직성'**이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총감독이 던진 '이방인'이라는 화두는 국가라는 경계를 허무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일부 국가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국가적 프레임 안에서 정의하려다 스텝이 꼬였다. Sightsynch는 이러한 현상을 보며 국가관 시스템의 실효성에 의문을 던진다.
결국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공간들은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그 공간을 점유한 인간의 보편적 고통이나 환희를 건축적·감각적으로 풀어낸 곳들이다.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호주관의 아치 무어(Archie Moore)가 보여준 것처럼, 개인의 족보를 통해 인류의 거대한 역사를 관통하는 집요함이 결여될 때, 국가관은 그저 세련된 선전장 혹은 진부한 아카이브로 남을 뿐이다. 우리는 이번 '최악의 명단'을 통해 현대 미술이 지향해야 할 진정한 공간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예술은 국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장벽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목소리를 담아낼 때 비로소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때문이다.